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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니는 굉장히 심플한 칵테일입니다. 칵테일이라는 게 여러 종류의 주류를 섞어서 만들지만 마티니는 오직 진과 베르무트, 여기에 올리브만 있으면 만들 수 있습니다. 더욱이 언뜻 보기에 맹물처럼 보이는 비주얼은 그 명성에 비해 주문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만들어버릴 정도.
놀라운 사실은 마티니가 ‘칵테일의 왕’이라고 불린다는 겁니다. 재료와 비주얼로 미루어 볼 때 이토록 심플한 칵테일에 왕이라는 호칭을 달아준 이유는 그 만드는 과정에서 비롯되죠. 진과 베르무트를 어떤 비율로 얼만큼의 시간 동안 어떻게 섞느냐에 따라 완성되는 마티니의 종류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마티니는 바텐더의 실력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죠.
사실 마티니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척 어처구니 없습니다. 마티니의 재료 중 하나인 베르무트를 만든 이탈리아 출신의 주류회사 이름이 ‘Martini & Rossi’였는데, 베르무트를 처음 출시한 1890년 대 당시, 자신들의 술을 홍보하기 위해 한 칵테일 레시피를 만들었고 이 레시피가 지금의 마티니가 된 것이죠.
칵테일의 왕답게 마티니는 다른 어떤 칵테일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즐겨 마시곤 합니다. 가장 유명한 마티니는 단연 제임스 본드의 마티니겠죠. 마티니는 007 시리즈에 걸쳐 숱하게 등장하는데 가장 정확하게 묘사되는 건 ‘카지노 로얄’에서 입니다. (카지노 로얄은 21번째 007 시리즈로 개봉되었지만 ‘이안 플레밍’의 원작으로 따지면 첫 번째 편입니다.)
제임스 본드가 마시는 마티니는 독특하기로 유명합니다. 보드카를 베이스로 하고 무엇보다 ‘Shaken, not stirred.’ 젓지 말고 흔들어서 만든 마티니입니다. 카지노 로얄에서는 정확한 레시피가 등장하는데요. 포커 게임 도중 바텐더에게 이렇게 주문합니다.
“Three measure’s of Gordon’s, one of Vodka, half of Kina Lillet, shake it over ice.
Then add a thin slice of lemon peel.”
스파이다운 디테일이죠. 제임스 본드는 포커 게임에서 이긴 후 이 레시피에 훗날 자신의 연인이 된 베스퍼(Vesper)라는 이름이 붙이게 되고, 지금까지 이 레시피로 만든 마티니를 ‘베스퍼 마티니’라고 부릅니다.
잠시 레시피를 살펴보죠. Gordon’s는 마티니의 주 재료인 진의 상품명이고, Kina Lillet은 와인과 오렌지 리큐어, 키니네라는 강장제를 섞은 것으로 와인에 브랜디와 허브를 넣고 증류시킨 베르무트와 비슷한 술입니다. 여기에 보드카 한 잔도 빠트리지 않았죠. 가장 중요한 부분은 ‘shake it’입니다. 본래 마티니는 기다란 칵테일 스푼으로 저어 만드는 칵테일인 반면 제임스 본드는 파격적으로 흔들어 달라고 주문한 것이죠. 도대체 왜 제임스 본드는 이렇게 ‘젓지 말고 흔들어서’ 주문한 걸까요?
1999년, 웨스턴 온타리오대학(UWO, University of Western Ontario) 연구팀이 영국의 의학전문지 ‘브리티시 메디컬 저널’에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저어 만드는 마티니보다 흔들어 만든 마티니 쪽이 암, 심장병, 성인병 등 예방에 효과적인 항산화제(antioxidant)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임스 본드의 넘치는 에너지가 바로 이 ‘젓지 말고 흔들어서’ 만든 마티니 덕분인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제임스 본드의 음주 습관을 보면 마티니 속 항산화제의 도움을 얻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카지노 로얄에서 ‘젓지 말고 흔들어서’ 만든 마티니가 마음에 든 나머지 연거푸 마시다가 적들이 몰래 탄 독을 먹게 되어 죽을 고비를 겪기도 합니다. 포커 게임에서 이긴 후에도 역시 이 ‘젓지 말고 흔들어서’ 만든 마티니를 마시고 음주 운전으로 추격전까지 펼치게 됩니다. 그 결과 애스턴 마틴 DBS를 박살내고 말죠.
카지노 로얄의 후속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도 어김없이 ‘젓지 말고 흔들어서’ 만든 마티니를 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적들을 추적하는 도중 비행기 안에서 제임스 본드의 옛 동료, 마티스에게 바텐더는 베스퍼 마티니의 레시피를 얘기해주며 제임스 본드가 6잔 째 마시고 있다고 말하죠. 이런 음주 습관으로 볼 때 제임스 본드는 평소 과도한 음주로 인해 우울증이나 암, 간경화, 고혈압 등의 성인병, 심지어는 발기부전에 시달렸을 듯 합니다.
지난해 영국 로얄더비병원 응급의학과 연구팀은 ‘브리티시 메디컬 저널’에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요. 이안 플레밍의 원작을 분석한 결과, 제임스 본드는 하루 평균 5잔의 마티니를 마시고 이는 영국 남성의 적정 음주량의 4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렇게 술을 마신다면 스파이는커녕 수명이 56세 불과했을 거라고 하네요. 재미있는 사실은 제임스 본드를 창조해 낸 이안 플레밍 역시 잦은 음주로 인한 심장병으로 56세에 사망했다는 겁니다.
어쩌면 ‘젓지 말고 흔들어서’ 만든 베스퍼 마티니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손떨림 증상을 겪고 있던 제임스 본드의 건강 상태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마티니는 저어서 만들 때 얼음을 건드리지 않은 채 진과 베르무트만 섞어주는 섬세한 기술이 필요하거든요. 제임스 본드의 경우 자신이 만들 때는 이렇게 섬세한 기술이 불가능했을 겁니다. 어쩌면 어떻게 만들던, 어떻게 마시던 상관없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마티니를 마시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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